"신군부, 5·18 직후 삼청교육대에 전투경찰까지 동원"

5·18기록관, 퇴직 경찰로부터 전경 복무 시절 일기 기증 받아
"삼청교육기관 피해 조사 관련, 군인 외 대상까지 범주 확장"

5·18민주화운동 이후 계엄 당국이 운영한 삼청교육대에 현역 복무 중이던 전투 경찰(전경)까지 동원된 사실이 당시 전경의 일기장을 통해 드러났다.



군부대 내에서 운영된 삼청교육대에서는 5·18 직후 신군부를 비판한 인사 또는 부랑자와 넝마주이 등을 대상으로 한 가혹 행위가 있었던 것으로 일부 확인됐다.

5·18 연구자들은 이번 일기장이 삼청교육대에 연행된 피해자들의 규모를 조사하는데 또 다른 단초가 될 것으로 보고 있다.

5·18기록관은 지난달 17일 퇴직 경찰관 A(67)씨로부터 전경 복무 당시 매일을 기록했던 일기장을 기증받았다고 14일 밝혔다.

A씨는 1979년 초부터 이듬해 말까지 광주경찰국 기동대 제2중대에 복무하면서 1980년 학원가 춘투 진압 과정과 5·18 당시 상황·후일담을 일기장에 썼다.

일기장에는 1980년 5월 당시 고조된 대학가 시위를 바라보는 경찰 당국의 시선과 18일 계엄군 투입, 21일 시민들을 향한 계엄군의 집단 발포 상황, 당시 안병하 경무관이 내렸던 경찰 해산 명령의 분위기 등이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5월 18일 일기에 '계엄군에 잡힌 수많은 학생들은 비참하리 만큼 얻어맞고 체포됐다', '초록이 내리던 아스팔트 위 시청 앞 광장 위로 온몸이 피투성이가 된 채 체포된 어느 남녀 2명이 계엄군의 구둣발이 채이며 끌려갔다'고 썼다.

계엄군의 집단 발포가 있었던 5월 21일에는 '주모자로 잡은 시민을 경찰국에서 어느 곳으로 후송하고 있었다' '오후 1시 시위대를 실은 차량이 경찰 저지선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집단 발포가 시작됐다'며 당시 상황을 전했다.

안 경무관이 내린 경찰 해산 명령 직후 상황도 엿볼 수 있었다. 당시 안 경무관은 시위대와 경찰 사이 유혈 충돌을 막기 위해 경찰 해산 명령을 내렸다. A씨는 '저녁 5시께 해산 명령을 받았다. 계엄군과 시민 사이 시가전이 계속됐다' '서로가 민간인으로 가장하기 위해 민가에 침입, 사복으로 갈아입었다'고 썼다.

A씨는 5·18 이후 전경 복무를 이어가던 중 8월 초에 31사단 내 삼청교육대로 차출당하기도 했다.

그는 1980년 8월 8일 일기장에 '수련생 4명이 (군부대)수용소 내에서 온갖 곤욕과 기합, 훈련에 여념이 없었다'고 썼다. 9월 4일에는 '중대로 귀대하며 관련 표창을 받았다'고도 적었다. 실제 A씨는 그해 9월 2일 31사단 모 포병단장으로부터 '삼청교육에 기여한 공이 크다'며 표창을 받은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 신군부는 군부대 내 삼청교육대를 운영하며 전두환을 비판하는 지역민들을 불법으로 연행해와 가혹행위를 저질렀다.

특히 불법 연행 대상에는 신원을 밝히지 못한 부랑자와 넝마주이도 포함됐다. 이중 넝마주이들은 광주에 계엄군이 물러난 5월 22일부터 옛 전남도청 사수·미화활동에 자진했다. '다양한 연령대의 넝마주이 100여 명이 항쟁지도부의 거점이 된 옛 전남도청을 지키기 위해 24시간 경비를 섰다'는 중복 진술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5월 27일 계엄군의 옛 전남도청 진압 작전 이후 모두 사라지면서 삼청교육대에 연행된 것이 아니냐는 의혹도 뒤따른다.

5·18 학자들은 A씨의 일기가 5·18 직후 삼청교육대의 운영 형태와 관련된 조사의 단초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김홍길 5·18기록관 학예연구사는 "신군부 통제 아래 경찰이 독자적인 위치가 아니었던 점에 따라 삼청교육기관 운영 과정에 전경이 차출됐을 가능성은 꾸준히 있어왔다. 이같은 내용이 실제로 확인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라며 "군부대가 운영한 삼청교육기관에 군인 신분이 아닌 전경도 차출됐다는 것은 군인 외 조사 대상이 늘어났다는 것을 뜻하기도 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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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외전남 / 손순일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