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상원 열사 유족 배상 청구권도 소멸 판결 "반인륜 범죄 면죄부"

5·18 정신적 손해배상 소멸시효 지났다는 정부 항소 인용 이어져
민변 "보상금 지급 아닌 헌재 위헌 결정 나온 시점부터 계산해야"

항소심 법원이 5·18 정신적 손해배상 소송과 관련, 5·18유공자 유족이 소송을 늦게 제기해 배상 청구권이 사라졌다는 정부의 주장을 연이어 받아들이면서 '국가 폭력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소멸 시효 제도라는 법적 안정성보다 중대한 인권 침해 사건의 국가배상 청구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헌법재판소의 판단이 있었는데도 신속한 권리 구제를 해야 하는 정부의 책임을 면해준 것 아니냐는 지적이다.

31일 법조계에 따르면, 광주고법 제2민사부(양영희·김진환·황진희 고법판사)는 고 윤상원 열사(1950~1980)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6명이 국가를 상대로 낸 5·18민주화운동 위자료 청구 소송에서 원고 일부 승소한 원심을 깨고 원고 일부 패소로 판결했다.

윤 열사는 1978년 광주 광천동 들불야학에서 노동권과 평등 사회의 중요성 등을 가르치며 노동·빈민·학생·문화 운동의 선구·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윤 열사는 1980년 5월 민족 민주화 대성회·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 주도, 투쟁위원회 조직 등으로 민주화 운동을 이끌었다.

윤 열사는 같은 해 5월 26일 궐기대회 결의문에서 항쟁을 군사 정변을 거부하는 민주화운동으로 정하고, 광주의 슬픔·고통·절망을 함께 느끼고 끝까지 끌어안아 역사를 바른 길로 이끌었다. 다음 날 새벽 시민군 대변인으로 옛 전남도청을 지키다 계엄군 총탄에 맞아 산화했다.


윤 열사의 어머니와 형제·자매 6명은 "헌정 질서 파괴 범죄에 정당하게 맞선 윤 열사가 군의 계획적인 살상 행위로 숨진 만큼, 정신적 고통을 국가가 배상하라"고 2021년 11월 민사 소송을 냈다.



1심은 원고들이 각 청구한 금액의 36.8%~39%를 인정했으나 2심 재판부의 판단은 달랐다.

2심 재판부는 윤 열사 어머니에게 1심보다 적은 위자료(윤 열사 고유 상속액 포함)만 인정했고, 형제·자매 6명에게는 고유 위자료 채권이 없다고 패소 판결했다.

윤 열사 형제·자매가 소송을 늦게 제기해 손해배상 청구권이 소멸했다는 정부의 항소를 받아들이면서다.

정부는 불법행위로 인한 손해배상 청구권은 손해·가해자를 안 날로부터 3년 안에 행사해야 한다는 민법을 토대로 소멸 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했다.

윤 열사가 민주화운동 보상금 지급 결정을 받은 1990년 12월로부터 3년이 지나 형제·자매가 위자료 청구 소송을 제기한 만큼, 배상 청구권이 사라졌다는 주장이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5·18 보상금 지급 대상자가 아니라 법률상 장애 사유가 없다"고 정부의 주장을 받아들였다.

이를 두고 "불의한 국가 권력이 저지른 반인권 범죄에 면죄부를 주고, 국가폭력 피해자에게 2차 가해를 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윤 열사 형제·자매가 2021년 헌법재판소 결정이 나오기 전까지 5·18 정신적 손해배상 청구권 행사 여부를 알 수 없었는데 법원이 소멸 시효 기간을 내세워 정부의 배상 책임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헌재는 2011년 민주화운동 보상금을 받으면 국가를 상대로 정신적 손해배상을 요구하지 못하도록 한 5·18보상법 16조 2항이 헌법에 어긋난다고 결정했고, 이후 윤 열사 유족을 비롯해 국가폭력 피해자들의 관련 소송이 이어지고 있다.

송창운 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광주전남지부 사무처장은 "반헌법적인 공권력 행사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한 국가에 저항한 민주화운동 사건에서 개인 간 불법행위 내지 일반적인 국가배상 사건에 대한 소멸 시효를 그대로 주장하는 것은 부당하다. 윤 열사 유족의 소멸 시효 시작점은 윤 열사가 5·18보상법에 따라 보상금을 지급받았을 때가 아닌 헌재 결정이 나온 2021년으로 봐야 한다"고 짚었다.

이어 "윤 열사 유족들은 법률 전문가가 아니어서 자신에게 고유한 위자료 청구권이 있는지 잘 알 수 없다. 국가폭력 사건에서 정부가 보상금 지급 시점을 기준으로 정신적 손해배상의 소멸 시효 시작을 주장하는 것은 신의성실의 원칙에도 위배된다. 유족의 위자료 청구권을 구체화하는 입법 보완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사법부가 소송이 늦을 수밖에 없었던 과거사 사건의 특수성을 폭넓게 해석하고, 정부의 신속한 권리 구제가 필요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조진태 5·18기념재단 상임이사는 "헌정 유린 범죄는 진실이 드러나도 시간이 한참 흐른 뒤라서 시효라는 벽에 막힌다. 법원이 정부의 소멸 시효 완성 주장을 받아준 것은 인권 보호 책무를 망각하는 것이고, 2차 가해를 저지른 것"이라며 "반인륜 국가폭력 범죄에는 국가배상 청구권과 수용 범위를 폭넓게 해석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5·18 당시 학살의 진상을 은폐한 국가가 뒤늦게 청구권 소멸을 주장하며 정신적 손해에 대한 채무 이행을 거절하는 것도 어불성설"이라며 "정부는 신속한 권리 구제가 정답임을 알면서도 책임을 저버리고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가 5·18 유공자와 달리 유족에게만 소멸 시효가 지났다고 항소한 것도 '이중 잣대'라는 비판이 쏟아지고 있다. 정부는 1·2심 모두 5·18 피해 당사자에게는 소멸 시효 완성을 항변하지 않고, 부모·배우자·형제 자매들에게만 소멸 시효가 지나 청구권이 사라졌다고 항소하고 있다.

최근 5·18 정신적 손배 소송 항소심에서 1심을 깨고 원고들이 패소하는 사례가 이어지고 있고, 이 가운데 고 노준현 열사(1956~2000)의 친형은 2심 패소 뒤 상고 기각 판결을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5·18단체 안팎에서는 입법 보완 등의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한다.

한편 윤상원 열사 유족들도 상고를 검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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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장진우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