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지법 제4형사부, 25차 직권재심 및 유족 청구 재심
"잡혀간 청년들이 뒷산에서 총살당했다."
1949년 제주4·3의 광풍이 몰아치던 시절, 서귀포시 표선면 토산리의 한 마을에서 떠돌던 소문이다. 당시 스물 한 살 청년이었던 희생자 고 김만중은 살기 위해 산속으로 피신했다. 이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70여년 동안 가슴에만 품고 살았던 제주4·3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법정에서 전해지고 있다.
제주지방법원 제4형사부(부장판사 강건)는 21일 오전 검찰 '제주4.3사건 직권재심 권고 합동수행단'이 25번째로 청구한 재심을 진행했다. 이날 재심은 지난달 제주4·3 전담 재판장으로 부임한 강건 부장판사의 첫 4·3 공판이다.
재심 대상인 희생자들은 1948년부터 1949년까지 제주도 일원에서 내란죄 또는 국방경비법 위반죄로 불법 군사재판에 회부, 유죄 판결을 받고 형무소 등에서 수형인 생활을 하다 총살 또는 행방불명됐다.
이날 법정에서는 희생자 유족이 출석해 70여년 전 아무런 이유 없이 군경에 끌려간 희생자들의 가슴 아픈 사연을 전했다.
1949년 6월, 서귀포시 대정읍 심평리에서 농사를 짓던 희생자 고 이정우는 밭에서 일을 하다가 이유 없이 군경에 끌려가 그대로 연락이 두절됐다. 그의 나이 22세였다. 이씨의 아내는 남편이 목포형무소에 수감돼 있단 말을 듣고 면회를 갔다. 그 곳에서 이씨는 아내에게 '형무소가 너무 추워 지낼 수 없다'고 호소했다. 제주로 내려온 이씨의 아내는 한달동안 뜨개질을 해 외투를 만들었고, 이를 전달하기 위해 목포형무소를 찾았으나 이씨는 행방불명된 상태였다.
또다른 희생자 유족 김씨는 "시아버지가 밭에서 일하다가 갑자기 끌려갔다"며 "시어머니도 세상을 일찍 떠났고, 홀로 남겨진 남편은 아버지의 생일도, 나이도 모르고 살았다"고 호소했다. 이어 "시아버지는 호적에 1947년생으로 돼있지만, 마을 사람들은 1949년이라고 한다"며 "남편은 아버지 사진도 하나 없고, 혈육도 없으니까 '아버지 손가락 발가락 한번이라도 만지고 싶다'며 그리워했다. 현재는 아파서 말도 못한다"고 털어놨다.
희생자 고 김병민의 아들에 따르면 김씨는 70여 년 전 폐병을 앓아 칩거 생활을 했다. 당시 폐병을 가진 이에게는 군경이든 토벌대든 접촉조차 하지 않았기 때문에 김씨는 끌려가지 않았다. 그러다 '마을 청년들은 전부 이호초등학교로 모이라'는 말을 듣고 나갔던 형수가 대량 학살에 휘말렸단 소식을 들었다.
형수는 총을 세 방이나 맞고도 기적적으로 살아남았다. 이에 김씨는 한밤 중 형수를 업어 동물병원으로 옮겼다. 다음날 김씨는 형수가 덮을 이불 등을 챙기고 병원으로 가던 길, 군경이 쏜 총을 맞고 체포됐다.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그는 이후 골령골에서 총살당했다.
검찰은 이날 법정에서 "제주4·3사건은 한국전쟁 이후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비극적인 사건"이라며 "희생자들은 아무런 죄가 없음에도 군경에 연행돼 처벌받은 것으로 보이고, 이와 관련한 증거가 전혀 없다"고 말한 뒤 무죄를 구형했다.
재판부는 이날 유족들의 진술을 모두 듣고 "판사는 판결문으로 말한다. 판결문의 어떤 목소리를 담아야 하지 않겠나는 생각이 든다"며 "첫 재판인 만큼 고심해서 판결문을 작성하겠다. 결론은 똑같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들에 대한 선고 공판은 오는 4월4일 오전 10시에 진행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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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취재부장 / 윤동원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