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겉만 멀쩡, 빗물 머금어 못 팔아" 나주 멜론농가 시름

쏟아진 장맛비로 하우스 침수…열흘여 앞두고 출하 단념
답답함에 진흙밭 맨발 배수작업…"겨울 멜론이 더 걱정"

"겉만 멀쩡하지, 속은 흙탕물 머금어서 싹 다 버려야 해."

연일 거센 장맛비가 내린 전남 나주시 세지면 동곡리 한 멜론 재배 시설하우스.

35년째 멜론을 재배했다는 최병택(82)씨는 하우스 이곳저곳을 둘러보다 말 없이 나와 허공만 바라봤다.



하우스는 입구부터 발이 푹푹 빠질 정도로 진흙밭이 됐고 고랑 곳곳에는 물 웅덩이가 고여 있었다.

멜론 묘목이 심어진 두둑에도 흙탕물이 들어찼다가 빠진 흔적이 뚜렷했다. 뿌리 쪽 이파리에는 흙과 모래가 묻어 있었고 금세 노래지기 시작해 본래 푸른 빛을 잃었다.

이 시설 하우스는 지난 27일부터 이틀간 쏟아진 비로 인근 농업용 수로에서 넘쳐 흘러들어온 흙탕물로 하루 꼬박 잠겨 있었다. 묘목 뿌리로까지 흘러들 정도로 두둑 위까지 차오른 물은 전날 온종일 양수기를 돌려 간신히 빼낼 수 있었다.

출하 일자를 열흘여 앞두고 일어난 침수 피해였다.

최씨는 지난 4월부터 수정(30일), 생육(60여 일)을 거쳐 석 달간 애지중지 키운 여름멜론을 가리켜 "다 쓸모 없게 됐다"며 한탄했다.

멜론 모종은 습해에 취약해 오랜 시간 물에 잠기거나 비를 맞은 직후 날이 개면 과육이 썩기 시작한다.

최씨는 손에 잡히는 멜론 하나를 따 칼로 갈라 속을 내보였다. 겉보기에 멀쩡해 보였던 멜론은 씨 주변을 둘러싼 과육에 흙과 물기가 눈에 띄었다.

최씨는 과육을 일부 잘라내 입에 넣었다가 "물 들고 당도가 떨어져 못 먹는다"라며 곧바로 뱉었다.


최씨는 "그제 밤 11시 전후로 한 치 앞도 안 보일 정도로 비가 쏟아져 내렸다. 짧은 시간에 그렇게 비가 쏟아지니 갑자기 불어난 물에 하우스 안이 다 젖었다"면서 "여태 농사 지으면서 태풍으로 시설하우스가 넘어진 적은 있었어도 침수 피해는 처음 겪어본다"라고 말했다.

이웃 농민도 "수로 정비가 잘 돼 있어 웬만하면 시설하우스로 물이 넘쳐 들어오지는 않는다. 과거에도 200㎜ 안팎 비가 와도 문제는 없었다. 이번에는 1시간도 안 되는 짧은 시간에 비가 퍼부으니 침수까지 발생한 것 같다. 천재지변이다"라며 거들었다

또 다른 멜론 재배 농민 이동헌(67)씨도 뻘밭으로 변해버린 하우스 안에서 '뭐라도 해보자'는 심정으로 막바지 배수 작업을 하고 있었다.

이씨는 바지 가랑이를 무릎 위까지 걷어 올린 채 맨발로 고랑 사이사이를 다니며 웅덩이에 양수기 관을 댔다. 시뻘개진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 흘렀다.

귀농 직후 멜론을 재배한 지 3년 된 이씨는 처음 겪어보는 일에 허탈한 듯 연신 헛웃음만 지었다.


이씨는 "여태 이런 적이 없어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 마냥 손 놓고만 있을 수는 없어 물을 퍼내고 있다"고 했다.

"자식처럼 키운 멜론이 겉보기엔 멀쩡한데 다들 '내다버려야 한다'고만 하니 속상하다. 하늘이 무심하다"며 쓰린 속마음을 드러냈다.

피해 농민들은 여름 멜론 출하는 단념하고 땅이 마르는 대로 멜론 묘목을 모두 걷어낼 계획이다.

오는 9월부터 시작하는 겨울멜론 농사도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라고 했다.

최씨는 "기왕 망친 여름 농사는 그렇다 쳐도 후작(後作·겨울 출하 멜론)까지도 걱정이다"며 "장마가 이번주 내내 계속된다고 하고, 여름 태풍도 올 텐데 불안감이 크다. 밭을 한 달가량 말려야 하고 시설하우스를 다시 손 봐야 하는데 생각만 해도 막막하고 답답하다"고 토로했다.

지난 27일 오후 9시부터 전날 오전 9시까지 나주 지역 공식 누적 강수량은 237.9㎜다. 특히 전날 자정 사이 1시간 동안 최대 48.5·㎜의 강한 비가 쏟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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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취재본부장 / 조성일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