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사에 불리한 기사쓴 기자 상대 녹음 시도
식당에 녹음·녹화장치 설치…주거침입 기소
1·2심 엇갈려…전합 "주거침입 성립 안된다"
"실제 거주자 평온 침해했는지 여부로 판단"
"주거침입 된다"고 본 초원복집 판례 변경돼
아무나 출입할 수 있는 식당에 상대방과의 대화를 녹음하기 위한 장치를 설치하러 들어갔다면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대법원 판단이 나왔다. 이른바 '초원복집 사건'에 관한 대법원 판례가 25년 만에 바뀐 것이다.
24일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주거침입 혐의로 기소된 A씨 등의 상고심에서 무죄를 선고한 원심을 확정했다.
운송업체 부사장인 A씨와 관리팀장 B씨는 지난 2015년 1~2월 전남 광양시에 위치한 식당을 침입한 혐의로 재판에 넘겨졌다.
당시 한 인터넷 언론사는 수입이 금지된 왕겨펠릿(벼 껍질로 만든 바이오연료)이 화력발전소에 납품되던 중 압류돼, 철도 운송시설에 보관되고 있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해당 언론사는 압류된 왕겨펠릿이 썩은 채 방지돼 먼지가 날린다는 점을 지적했는데, 기사에는 A씨 등이 소속된 운송업체가 시설을 관리하고 있다는 취지의 내용도 담겼다.
A씨 등의 업체는 민원이 발생하고 기자들이 찾아오게 되자, 해당 기사를 작성한 C씨에게 향응을 제공하고 그가 부적절한 요구를 하는 장면을 녹음·녹화하려 마음먹은 것으로 조사됐다.
구체적으로 A씨 등은 지난 2015년 1월부터 2월까지 4차례에 걸쳐 C씨에게 식사를 대접한 식당에 마련된 방에 들어가 녹음·녹화장치를 설치하고 회수한 혐의를 받는다.
수사기관은 A씨 등이 식당 주인의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으로 보고 주거침입 혐의를 적용했다.
재판 과정에서 A씨 등은 자신들이 기자의 협박에 대비한 것이며, 들어간 식당도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곳이었다고 주장했다.
1심은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음식점이라도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할 목적으로 들어갔다면 영업주의 명시적 또는 추정적 의사에 반해 들어간 것으로 볼 수 있다"며 징역 4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반면 2심은 A씨 등이 불법으로 녹음·녹화한 것은 아니므로 주거침입 혐의를 인정할 수 없다고 했다.
통신비밀보호법상 허용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 간의 대화인데, A씨 등은 자신들과 얘기를 나눈 C씨와의 대화를 녹음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이처럼 불법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고 식당에 들어가는 것 자체는 주인의 허락을 받았다는 점에서 주거침입 혐의가 인정되지 않았다.
전합은 A씨 등을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주거침입죄로 처벌하려면 출입 당시의 행위가 객관적·외형적으로 어땠는지, 주거의 형태와 용도는 무엇인지, 외부인에 대한 출입 통제·관리가 어떻게 이뤄지고 있었는지, 출입 경위와 방법이 무엇이었는지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특히 '거주자의 평온 상태'가 실질적으로 침해됐는지 여부를 따져 주거침입죄의 성립을 판단해야 한다는 게 전합의 설명이다.
이런 점을 고려했을 때 A씨 등은 녹음 장치를 설치하러 들어가는 과정에서 식당과 그 주인의 평온을 깨뜨린 건 아니라고 했다. 물론 식당 주인이 녹음 장치 설치를 위한 출입은 허락하지 않았을 수 있지만, 평온이 침해되지 않아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것이다.
다만 김재형·안철상 대법관은 실질적으로 평온을 침해한 모습이 무엇인지 구체적이고 명확하게 해석하기 어렵다며 별개의견을 냈다. 이들 대법관 역시 A씨 등에게 주거침입죄를 물을 수 없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지만, 거주자의 의사를 중요한 요소로 삼아 판단해야 한다는 취지다.
이날 전합의 판단으로 지난 1997년 '초원복집 사건'에 대한 대법원 판례는 변경됐다.
지난 1992년 부산의 복어요리 식당인 초원복국에서 정부 기관장들이 관권선거를 모의했다는 것이 드러났다. 김기춘 당시 법무부 장관을 비롯한 주요 기관장들은 14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영삼 당시 민주자유당 후보를 당선시키려 지역감정을 부추기자는 등의 대화를 나눴다. 이때 나온 "우리가 남이가"는 지역감정의 대명사와 같은 표현이 되기도 했다.
이 사건은 통일국민당 측이 식당에 미리 장치를 설치해 도청했고 그것이 언론에 보도돼 세상에 알려졌다.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한 통일국민당 관계자들은 주거침입 혐의로 재판에 넘겨져 유죄 확정 판결을 받았다.
당시 대법원은 식당 주인이 도청용 송신기를 설치하려는 목적의 출입은 허용하지 않았을 것이라며 주거침입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불법 선거운동을 적발하기 위해 도청이 이뤄졌더라도 타인의 주거에 장치를 설치한 건 정당행위라고 보기 힘들다고도 했다.
이번 전합의 판단은 지난해 나온 주거침입죄에 대한 판결의 연장선상이다.
전합은 내연녀의 허락을 받고 집에 들어가 부정행위를 한 뒤 그 남편으로부터 고발된 경우 주거침입죄로 처벌할 수 없다는 판단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 전합도 남편이 부정행위 목적의 출입을 허용한 건 아니지만, 주거의 평온이 깨진 건 아니라는 점에서 주거침입죄로 처벌이 불가능한 것으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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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원.검찰 / 김금준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