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설 정도령의 대한광복군정부 조직 시기는 1913년 말"

진천 학술회서 반병률 한국외대 명예교수 지적

보재(簿齋 이상설(李相卨·1870~1917) 선생이 정도령을 맡았던 대한광복군정부의 조직 시기는 1914년이 아닌 1913년이란 주장이 나왔다.



진천문화원이 주최하고 진천향토사연구회가 주관한 ‘2023년 보재이상설기념관 건립기념 학술회’가 12일 생거진천종합사회복지관에서 열렸다.

이날 학술회의에서 반병률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는 '1910년대 러시아 연해주에서의 이상설의 민족운동-대한광복군정부를 중심으로' 주제 발표에서 이같이 밝혔다.

반 명예교수는 "이상설은 대한광복군정부 초대 정도령(正都領)으로 있다가 사퇴하고 이동휘가 2대 정도령이 됐다"며 대한광복군정부 책임비서를 지낸 계봉우(桂奉瑀·1880~1959)의 기록을 들어 "대한광복군정부 최고지도자를 정통령(正統領)으로 표기하는 건 명백한 오류"라고 지적했다.

그는 그동안 알려진 대한광복군정부 조직 시기도 수정했다.

계봉우가 1936년 작성한 자필이력서에서 "1913년에 중령과 원동에 있는 조선인 민족혁명자로 조직한 대한광복군정부의 책임비서가 됐다"는 기록에 주목했다.

학계는 대한광복군정부가 1914년 러시아 연해주에서 설립한 무장 독립운동 단체이자 군정부(軍政府) 또는 망명정부로 설명한다.

반 명예교수는 이상설 선생이 1913년 10월 19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권업회 특별총회에서 '권업신문' 사장 겸 주필에 선출됐다가 논설 두 장을 쓰고 사임했고, 대한광복군정부 수석인 정도령에 피선됐지만 이 역시 바로 물러나고 12월 초 하바롭스크로 떠났다고 분석했다. 이상설 선생은 이때 대한광복군정부와 관계를 단절했다는 게 반 명예교수의 설명이다.

그는 이들 기록을 종합할 때 대한광복군정부 조직 시기는 러시아 한인사회에서 대동단결 분위기가 고조됐던 권업회 특별총회 직후인 1913년 10월 말 또는 11월 초로 추정했다.

이날 학술회는 한상도 건국대 사학과 명예교수의 '리더로서 이상설 선생의 면모' 기조발제를 비롯해 이명화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장의 '이상설의 구미 외교 활동과 의의', 정제우 전 진천향토사연구회장의 '보재 이상설의 국권회복 독립운동', 황경수 청주대 교수의 '보재 이상설 기념관 운영의 효율화 방안' 주제발표가 진행됐다.

종합토론은 김양식 청주대 교수가 좌장을 맡고 이민원 동아역사연구소장, 채영국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원, 김경열 충북대 국어교육과 교수의 토론이 이어졌다.

학술회에는 이상설 선생의 외손녀인 이현원씨와 친족인 이문원 수당기념관장도 참석했다.

보재 이상설 선생은 1907년 헤이그만국평화회의에서 이준·이위종 열사와 함께 국권회복을 국제여론에 호소했다.

1910년 국권피탈 이후 러시아 연해주 일대에서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앞장서다가 향년 48세를 일기로 니콜리스크 우스리스크에서 순국했다.

한편 이상설기념관은 82억1500만원을 들여 선생의 고향인 진천읍 신척리 135 일대에 지하 1층, 지상 1층 규모로 전시관, 다목적관(교육관·강당·전시실) 등이 조성되고 있다. 내년에 개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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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취재본부장 / 김은호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