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 학자들, '조선통신사 역관 최천종·김한중 우익손에 죽음' 주장"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

임진왜란 때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갔다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역관(譯官) 최천종(崔天宗)과 부관 김한중(金漢重)의 유해를 고국으로 옮겨와야 한다는 한 사학자의 주장이 제기됐다.



23일 한일문화연구소 김문길 소장(부산외대 명예교수)에 따르면 일본과 한국 문화사에서 높이 평가 받는 조선통신사는 조작된 문서와 도장에 의해 초빙됐다는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중국을 강점하기 위해 대마도 번주 소요시토시(宗義智)에게 조선과 동맹을 부탁했다.

대마도 번주는 조선과 동맹을 맺기 위해 문서와 도장(옥)까지 위조하면서 추진했으나 실행되지 못했다.

결국 임진왜란은 발발했고 전쟁이 끝난 후 일본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막부를 열었다. 조선과 화친을 맺기 위해 조선통신사를 초빙하도록 대마도 번주에게 재부탁했다.

대마도 번주는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음에 따라 조선에서 쇄신사(조선인 포로 송환)를 보낼 것이라고 보고했으나 본국에서 이를 무시했다. 할 수 없이 대마도 번주는 조선 임금 도장(옥새)과 문서를 위조해서 양국에 보냈다. 일본에선 조선통신사로 맞이했고 조선에선 포로로 잡혀간 사람이 돌아온다는 의미로 교류가 시작됐다.

조선통신사 이름으로 일본에 갔으나 평화 교류의 의미는 없었다. 에도 막부의 중신인 아라이 하쿠세끼(新井白石)는 조선통신사를 못마땅히 여기고 추방운동을 벌였다. 이때 안타깝게도 역관(통역단장) 최천종(경주 출신)은 일본인 손에 살해당하고 만다.

살해당한 이유는 아라이가 주장한 조선인 멸시론 탓이다. 최천종의 죽음을 세상에 알리기 위해 에도 막부의 카부끼단(연극단)이 '최천종 조센징 살해' 제목으로 연극을 공연하니 인기가 많았다.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이처럼 최천종 살해 사실은 일본 국민들의 호응이 높아 교토에 가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인 귀·코 무덤(귀 무덤)이 있는데, 그곳 귀 무덤 울타리에서 최천종 살해 연극을 공연하고 기념으로 비석을 각각 만들어 세웠다. 일제로부터 해방될 때까지 조선 합방 성토대회도 귀 무덤에서 열었다.

안타깝게도 김한중은 메이와 원년(明和 元年 : 甲ㄹ申年) 2월 8일 11회 차 마지막으로 일본에 갔으나 병사(病死)했다.

김 소장은 "일본 일부 학자들은 병사가 아니고 아라이 하쿠세끼의 조선인 멸시론에 따라 우익단체 손에 죽임을 당했다고 한다"면서 "조동정 주지 호사카 마사아끼는 이들이 고향(한국)에 돌아가도록 주선해야 한다고 추모의 인사말을 전했다"고 밝혔다.

한편 최천종·김한중의 묘는 오사카시(市) 서구 혼마치 1 정목 9-3번지 조동종 다케린지(本町 1丁目 9-3 番地 曹洞宗) 공동묘지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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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경남본부장 / 최갑룡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