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생 열사 뜻 받들자"…5·18 앞두고 광주 추모열기 고조

5·18민주화운동 44주기 6일 앞둔 국립5·18 민주묘지
동국대 역사교육과, 항쟁 당시 숨진 선배 기리러 방문
고 김녹영 의원 유족도 "억울하게 돌아간 아버지" 눈물

"열사들의 고귀한 희생이 헛되지 않도록 마음 한 켠에 새기겠습니다."

12일 오전 광주 북구 운정동 국립5·18민주묘지. 민주화를 위해 싸우다 희생된 오월 열사들을 향한 발걸음이 잇따르면서 참배 분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공식 참배곡 '님을 위한 행진곡'에 발을 맞춘 참배객들의 손에는 하얀 국화꽃이 한 송이씩 쥐어져 있었다. 백발의 어르신부터 앳된 꼬마까지 무거운 표정으로 헌화·묵념했다.



참배를 마친 시민들은 저마다 흩어져 열사들의 묘소로 향했다. 12살 나이로 최연소 공식 사망자로 기록된 '오월의 막내' 고(故) 전재수 군의 묘소 등이 이날 주요 참배 묘소였다. 전 군이 남구 송암동 한 논가에서 친구와 놀던 중 계엄군의 오인 교전에 휘말려 짧은 생을 마감했다는 무거운 설명이 이어지자 참배객들의 표정이 숙연해졌다.

비슷한 시각 동국대 역사교육학과에서 온 대학생 20여 명도 선배인 고 박병규씨의 묘소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동국대 1학년 재학 도중 광주에서 항쟁에 참여한 박 씨는 당시 시민수습위원회로 활동했다. 박 씨는 1980년 5월 26일 저녁 어머니에게 마지막 안부 전화를 한 뒤 이튿날 새벽 옛전남도청에서 벌어진 최후 항전에 참여, 계엄군에 맞서다 숨졌다.

학생들은 박 씨의 묘소 앞에서 선배의 희생을 기리며 함께 묵념했다. 묵념을 마친 뒤 박 씨 주변 열사들을 살핀 학생들은 다시 흩어져 저마다 참배를 이어갔다.


고 김녹영 국회의원의 딸 김현(64)씨도 이날 아버지를 만나러 민주묘지를 찾았다. 김대중 내란 음모에 휘말려 모진 고초를 겪다 훗날 숨진 아버지를 향한 서운함과 미안함이 40년 넘도록 그를 옭아매고 있다.

김씨는 아버지가 계엄령 발표 직전 중앙정보부에 의해 연행돼 남산으로 끌려간 기억을 곱씹었다. 군홧발에 유린당하는 광주시민들의 '도와달라'는 전화가 집으로 빗발쳤지만 아버지의 부재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며 당시를 토로했다.

어버이날 챙기지 못한 카네이션을 들고 온 김씨는 아버지의 묘소를 말없이 쓰다듬으며 차오르는 슬픔을 삼켰다. 1985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아버지는 광주시민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있었다고도 당부했다.

김씨는 "정적에 의해 억울하게 고초를 겪은 아버지가 그립다. 눈물을 참으려 해도 자꾸만 나온다"며 "44년이 지나 민주화는 이뤄졌지만 정치는 그대로다. 죄인이 자리를 하고 또 그게 훈장처럼 여겨지는 시대상이 변하지 않고 있다. 바뀌어야지 않겠는가"라고 지적했다.

이서연(21·여) 동국대 역사교육학과 학회장도 "5·18 과정에서 대학생들은 민주화를 쟁취하고자 권력에 맞서 싸웠다. 오늘날 대학생들은 의견표출에 소극적이고 제약도 있다"며 "대학생들이 과거 오월 영령들처럼 두려움 없이 의견을 내세우고 당당해질 수 있길 바란다"고 했다.

인천에서 가족과 참배하러 온 이소민(14)양은 "학교에서 영화 '택시운전사'를 통해 배운 5·18 현장에 설 수 있어 새롭다"며 "아직 모르는 것이 많지만 분명한 것은 독재로 인해 더이상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과 민주화를 외치다 숨진 영령들의 헌신이 잊혀져선 안된다는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날인 11일 기준 이달 한 달 동안 민주묘지를 찾은 방문객 수는 1만953명으로 집계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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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장진우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