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걱정없는 나라' 만든다더니…떠도는 소아암 환자들

정부 '어디서나 암 걱정없는 나라' 공언했지만
소아청소년암 환자 암 치료 의사 찾아 떠돌아
환자 절반 이상 거주지 떠나 서울·경기서 치료
강원·경북 소아암 전문의 '0'…1명인 곳도 다수
전문의 절반 가량 10년내 은퇴…진료공백 우려
치료기간 2~3년…경제적 부담에 가족 붕괴도

“아이가 열이 날까봐 매시간 체온을 잽니다. 그런데 제가 사는 춘천에는 대학병원이 2곳 있는데, 백혈병 치료를 하는 소아청소년과 선생님이 안 계셔서 서울로 치료를 받으러 다닙니다. 아이가 미열만 나도 담당 선생님이 있는 서울로 가야해요."(소아청소년암 보호자A)

"둘째인 7살 아이 입에서 ‘외롭다. 슬프다. 나는 안 태어났어야 한다’는 말이 자꾸 나오더라고요. 첫째가 장거리 환자여서 저희가 한 달에 3주를 타지에서 있다보니 둘째가 성격이 조금씩 우울해지는 것 같더라고요. 항상 '슬프다'고 하고요.”(소아청소년암 보호자B)



소아청소년암 진료 체계가 붕괴 위기에 직면했다. 정부가 지난해 3월 '어디서나 암 걱정 없는 건강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소아청소년암 환자들은 암을 치료할 의사를 찾아 떠돌아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3월 발표한 '제4차 암관리종합계획'의 비전은 '어디서나 암 걱정 없는 건강한 나라'다. 하지만 현재 소아청소년암 환자들은 거주 지역 내 대형 병원에서 치료를 받기 어렵다.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턱없이 부족해 소아청소년암 환자가 입원할 수 있는 병원이 줄어들고 있어서다.

6일 대한소아혈액종양학회에 따르면 서울을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에서 소아청소년암 환자의 절반 이상이 대부분 거주지역을 떠나 서울·경기 등 다른 지역에서 치료를 받고 있고, 그 비율은 점차 증가하고 있다.

특히 강원도와 경북은 소아암 전문의가 한 명도 없고, 충북, 광주, 제주, 울산은 각각 1명 뿐이여서 입원치료가 불가능한 상태다. 울산의 경우 은퇴한 교수 1명이 외래 진료만 하고 있다. 또 4~5명이 있는 지역도 병원별로는 1~2명에 불과한 인원이 근무 중이여서 항암 치료 중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응급 상황에 대처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최근 소아청소년과 전공의가 없는 지방 병원에서는 1~2명의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주말도 없이 매일 입원환자와 외래환자를 관리해야 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학회는 "중증 진료 환자를 받을수록 적자인 우리나라 의료보험수가 구조와 소아청소년암 진료에 대한 국가의 지원이 전무한 현실에서는 어느 병원도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를 추가로 고용하지 않으려 한다"면서 "하지만 어떤 의사도 주말도 없이 혼자서 중증 환자 진료를 책임질 수는 없다"고 지적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진료 중인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들은 모두 67명으로, 평균 연령은 50.2세다. 이들 중 절반 가량은 10년 안에 은퇴 예정이다. 최근 5년간 신규 소아혈액종양 전문의가 평균 2.4명에 불과한 것을 감안하면 10년 후에는 소아혈액종양 진료 공백이 우려되는 실정이다.

현재 국내 소아암 환자들의 5년 생존율은 약 80%로, 국제적인 수준(약 85%)에 도달해 있다. 하지만 중증도가 높아 치료 난이도도 높다. 암세포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면역을 담당하는 몸 속의 다른 세포들과 장기까지 손상을 입어 면역력이 크게 떨어질 수 있다. 특히 발열 증상이 나타나면 패혈증과 같은 중증 감염으로 빠르게 진행할 수 있어 가능한 빨리 입원해 항생제 치료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소아응급실이 문을 닫아 열이 나 입원이 가능한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적절한 치료 시기를 놓쳐 중증 패혈증으로 악화돼 중환자실로 가는 경우도 발생하고 있다.

서울의 한 대형병원 소아청소년과 전문의는 "소아암은 완치율이 세계최고 수준이지만, '암 정책', '소아청소년과 질환', '희귀질환' 그 어느 것에도 포함되지 못하는 깍두기 신세"라면서 "치료기간이 2~3년 정도 걸리는데, 그동안 가족은 치료비와 주거비 등 경제적 부담에 시달리고 가족이 붕괴되는 경우도 많이 본다"고 털어놨다.

환자 치료에 필요한 시설·인력 등 열악한 의료 인프라가 개선되지 않으면 소아혈액종양 전문의들이 사명감만으로 버티는 것은 한계가 있어 소아청소년암 치료를 포기할 수밖에 없고, 소아청소년암 생존율은 점차 낮아질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학회는 "소아청소년암 환자는 성인암 환자에 비해 매우 적지만, 조혈모세포이식, 항암치료, 방사선치료, 면역치료, 뇌수술, 소아암 제거수술 등 치료의 강도나 환자의 중증도는 오히려 성인에 비해 높은 편"이라면서 "특히 대부분이 입원치료가 필요해 365일 24시간 응급상황에 대처할 수 있는 전문의가 병원별로 최소 2~3명 이상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어 "저출산 시기 출산율을 높이는 것도 중요하지만, 이미 태어난 소중한 아이들을 한명이라도 더 살릴 수 있도록 국가적인 소아청소년암 치료 지원이 매우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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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부 / 박옥순 기자 다른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