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발포는 사실상 전두환 지시" 학살자 만행 밝힐까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 대국민보고회, 발포 계통자들 증언
계림동·광주역·전남도청 앞 발포 해놓고 뒤늦게 자위권 천명

1980년 5·18민주화운동 당시 보안사령관 전두환이 발포 명령을 내린 뒤 반인도적 학살 행위를 감추려 했다는 실체가 점차 드러나고 있다.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는 16일 연 대국민 정례 보고회에서 "전두환 중심의 발포 명령이 있던 것으로 보고 이를 집중적으로 조사하고 있다"고 밝혔다.

5·18조사위는 발포 지휘 계통 관련 주요 인물 70여 명에게 실탄 배분, 발포 과정· 사후 조치, 상급자의 지시 여부 등을 조사했다.

조사 결과 전두환이 별도 보고를 받고 발포 명령을 내렸다고 추정할 수 있는 증언들이 나왔다.

1980년 당시 육군본부 인사참모부 차장 박모씨는 "발포 명령은 문서로 이뤄지지 않았다. 보안사 계통에서 지시가 내려갔다. 사실상 전두환의 지시라는 것에 동감한다"고 했다.

이희성 전 계엄사령관도 발포와 관련 "모두 내가 한 것은 아니다"는 취지로 말했다.

육군본부 전 보안부대장 김모 대령은 "참모차장 황영시가 광주 진압 작전의 실질적 사령관이었는데 황영시를 움직인 사람은 전두환 사령관"이라고 강조했다.

보안사령부 전 보안처 과장 윤모씨는 "광주 민주화운동 상황을 보고하러 갔더니 전두환 보안사령관이 더 상세히 파악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는 전두환이 정상적인 보고 체계와 다른 별도 보고를 받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는 대목이다.


3공수여단 전 대대장 김모 중령도 "1980년 5월 20일 야간에 실탄을 달라고 작전참모에게 요청했다. 참모는 '위에서 지시가 내려왔으니 실탄을 지급하겠다'고 답했다"고 증언했다.



1980년 5월 20일 광주역 일원 집단 발포 당시 "최세창 3공수여단장이 무전으로 발포 승인을 요청했다"는 무전병 증언도 있었다.

전두환이 1980년 5월 22일 보안사 주관 간담회에서 자신을 실권자라고 과시했던 점, 같은 날 백악관 책임자 회의 참석자들도 전두환을 실권자로 인정한 점, 대법원이 1997년 전두환을 내란 수괴라고 인정해 유죄 판결을 내린 점 등을 종합하면 "발포 책임이 전두환에게 귀속됨을 시사하고 있다"고 5·18조사위는 설명했다.

전남도청 집단 발포도 7·11공수 부대원 진술과 부상 피해 현황 대조를 통해 ▲제11공수여단 병력 일부에 의한 1차 일제 사격 ▲도청 본관 2층·옥상, 민원실 옥상, 전일빌딩·수협 건물에서의 2차 조준 사격 ▲도청에서 철수하는 과정의 집중 사격 등 3차례 이뤄진 것으로 조사됐다.

'발포 전 조직·체계적인 실탄 분배가 이뤄졌고, 자위권 천명(80년 5월 21일 오후 7시 30분)에 앞서 발포 명령이 있었다'는 점을 뒷받침하는 군 기록도 수두룩하다.

보안사령부의 '광주소요사태 진행 상황'에는 자위권 발동 전 4차례에 걸쳐 발포 명령을 한 기록이 남아 있다.

'1980년 기갑부대사'에는 80년 5월 21일 오전 8시 전투 태세인 진돗개 하나(실탄 분배와 발포가 허용)가 발령됐고, 오전 11시 각급 부대에 개인당 M16 소총 실탄 90발씩을 지급했다고 기록돼 있다.

505보안부대 일일속보의 '유사 시 발포명령 하달(1인당 20발)', 육군 제2군사령부 조치사항의 '전(全) 각하(閣下) : 초병에 대해 난동시에 군인복무규율에 의거 자위권 발동 강조' 등도 사실상 전두환이 발포 지시를 내린 정황을 뒷받침한다.



5·18조사위는 군 지휘부가 5월 19일부터 21일 오후 1시 사이 계림동, 광주역, 전남도청 앞 집단 발포로 비무장 민간인을 학살한 이후 뒤늦게 자위권 보유를 천명했다는 점은 위법하며 반인도적 발포와 비무장 시민 학살 행위를 감추기 위한 것이라고 보고 있다.

5·18조사위는 20곳 이상에서 50차례 이상의 발포가 있었던 것으로 보고 발포 명령과 책임 소재를 밝히는 데 주력할 방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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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 / 장진우 기자 다른기사보기